경남영상자료관
리플렛

경남영화이야기

[시네크리틱] <신세계로부터>: 보이는 거짓과 보이지 않는 진실 사이에서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11-15


<신세계로부터>: 보이는 거짓과 보이지 않는 진실 사이에서
영화와 종교를 관통하는 믿음에 관하여


송경원(씨네21 편집장)
 



믿음은 견고할수록 위태롭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내면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려 단단해진 자기 확신이다. 튼튼한 뼈대처럼 자신을 지탱해주는 내면으로부터의 믿음은 거센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다. 흔들림 없이 굳건하지만 밖으로는 한없이 부드러운 포용력과 여유도 갖추고 있다. 다른 하나는 외부의 무언가에 기대는 믿음이다. 믿음의 근거를 바깥에 위탁했기에 내면은 연약하기 그지 없다. 그 약한 속살을 감추려 겉으론 딱딱한 껍질로 무장한 채 자신의 믿음을 자랑한다. 얼핏 견고해보이는 믿음은 미세한 균열만으로도 허물어져 속이 먼저 썩어들어간다. 차이는 단 하나다. 믿음의 뿌리를 어디에 두느냐. 내 안에서 샘 솟는 믿음과 바깥의 무언가에 기댄 믿음은 겉으로는 비슷해보일지 몰라도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최정민 감독의 <신세계로부터>는 연약함과 단단함이라는 믿음의 두 얼굴을 오가면서 한 인간의 영혼을 성찰하는 영화다.



알고도 속는 것과 속고도 믿는 것


여기 한 여인이 있다. 명선(정하담)은 탈북하는 과정에서 아들을 잃고 화신교라는 종교에 의지한다. 화신교는 10명의 믿음을 모으면 한 사람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화신교의 교수 신택(김재록)은 눈이 먼 상황이라 유일하게 자신을 보살피는 명선에게 의지한다. 명선에겐 아들을 부활시켜줄 화신교의 교주 신택이 필요하고, 신택에겐 자신을 돌봐줄 명선이 필요하다. 북한에서 넘어온 두 사람은 경남 고성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시작할 준비를 마친다. 명성과 신택이 경남 고성에 자리를 잡는 시점부터 시작하는 영화는 인물들의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유발한다. 화신교가 어떤 종교인지, 명선은 왜 화신교에 그토록 목을 매다는지 같은 정보들이 차례로 주어지는 과정은 적어도 두가지 효과가 있다. 하나는 관객이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처지에 몰입하는 서스펜스를 유발한다. 이는 대부분의 영화의 매커니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신세계로부터>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정보의 차단과 유예과 영화의 근본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살리고 싶은 엄마의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설정이 던지는 질문은 명료하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명선에게 아들의 부활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고정 값이다. 따라서 아들이 부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신세계로부터>의 모든 딜레마는 명선의 목적지향적인 믿음을 외부에서 흔들면서 발생한다. 명선은 부활의 교리를 간절히 믿고 싶지만 주변에선 그게 아니라는 증거들이 계속 나타난다. 차라리 외부로부터의 공격은 견딜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견뎌내야 하는 시련으로 다가와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하지만 의심의 씨앗이 하나둘 박히기 시작하면 내면의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신세계로부터>가 상영시간 내내 집중하는 건 믿고 싶은 욕망과 믿을 수 없는 증거들 사이 치열한 대결이라 해도 좋겠다. 이건 옳고 그름이나 논리의 대결이 아니다. 차라리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의 마음 속 균열에 대한 관찰에 가깝다.


명선과 기택의 화신교가 경남 고성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믿음의 문제는 주변으로 확장된다. 그즈음 영화는 화신교의 교리를 슬며시 알려준다. 명신의 나레이션으로 서술되는 화신교의 교리는 마치 잘 짜인 딜레마의 미로 또는 논술 문제 같다. “죽음과 탄생으로 우주와 만물의 균형을 맞추는 화신님께 죽거나 묻힌 곳 근처에 영이 담긴 물을 부어 놓고 10명이 모여서 진심으로 믿고 기도를 올리면 다시 부활할 수 있어. 죽은 지 600일이 넘으면 육체는 부활할 수 없어. 이후에는 선악 심판 뒤에 영혼이 소멸하거나 화신님께 기도가 닿으면 화국에서 영이 부활하여 다음 생을 기다릴 수 있지.” 부활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믿음을 가진 열 사람이 모여야 한다. 명선은 이를 위해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벌인다. 열 명이라는 숫자는 쉬운 듯 어렵다. 특히 사이비 종교로 낙인찍혀 설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결국 명선이 포교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초월적인 힘의 증거를 보여주거나 자신처럼 소망이 논리를 앞서는 절박한 사람을 찾거나. 여기에 600일이라는 시간 제한이 추가되며 절박함은 배가된다.



부활의 타임리미트를 앞둔 명신은 화신교의 교주(이하 화주)인 신택에게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믿음이 흔들려서가 아니다. 애초에 명신에게 부활이 되느냐 아니냐는 고민의 단계가 아니다. 아들의 부활이 간절한 그녀에게 부활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당위에 가깝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믿음을 가진 신도가 필요하다. 설득을 위해 증거가 필요해진 명신은 화주에게 처음으로 질문한다. 신은 진짜 있냐고. 이것은 불신자의 회의가 아니라 도리어 맹목적인 믿음의 결과로 보인다. 증거가 있어서 신을 믿는게 아니라 신이 반드시 필요하니 증거를 보여달라는 간청. 때마침 화주 신택은 신묘한 힘을 발휘하여 보일러 수리공 진수(진용욱)의 사연을 맞추면서 화신교의 신도로 끌어 들인다. 영화는 이때부터 방향을 전환한다. 믿음에 대한 질문에서 사람들 사이의 갈등으로 말이다.

 
믿음은 관성 저항이 세다. 시작하는데는 많은 에너지가 들지만 한번 문턱을 넘고 가속도가 붙으면 마치 전염되듯 퍼져나간다. 화신교 역시 두 번째 신도 진수의 합류 이후 신도가 되겠다고 자청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렇게 10명을 확보하기 위한 포교활동이 자리 잡는가 싶더니 북한에서부터 신택을 모셔온 재숙(명세미)과 영숙(신나래)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명숙을 중심으로 고성에 터를 잡고 새롭게 교세를 불려 나가던 이들과 북에서부터 함께 했다는 재숙과 명숙 사이 미묘한 알력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재숙과 영숙은 능숙한 솜씨와 적극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끌어들일수록 명숙은 어딘지 초조해 보인다.

 
재숙과 영숙의 포교활동은 화려하고 효율적이지만 어딘지 가볍다. 심지어 부활의 차례까지 바꾸려 하자 명숙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결국 재숙과 영숙의 진짜 목적이 드러나면서 상황은 파탄에 이른다. 사실 신택과 화신교를 전혀 믿지 않았던 재숙과 영숙은 신택을 이용해 돈을 한몫 챙겨 달아난다. 거짓 믿음의 실체가 밝혀지고 한바탕 소란이 지난 후에도 명선은 떠날 수 없다. 그러자 신택은 아들을 살릴 최후의 수간이 있다며 명선을 다시 한번 붙잡는다. 화신교의 교리에 따라 명선이 화주를 물려받으면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속은 걸 알아도 결국 믿을수 밖에 없는 명선은 신택의 마지막 거짓말을 다시 한번 믿기로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방식


<신세계로부터>는 화신교가 진짜인지, 부활이 이루어질 것 인지 여부를 두고 다투지 않는다. 처음부터 부활의 논리는 어설프기 그지없고, 화신교와 기택의 행색은 사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수 밖에 없는 명선의 처지를 알고 나서 관객마저 서서히 명선의 심경에 물들어 가도록 이끈다는 점이다. 어설픈 거짓과 사기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 무언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상영시간 내내 조금씩 싹튼다. 종교에 설득이 되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화신교와 다른 종교가 포교 경쟁을 하는 것을 나란히 보여주며 종교가 가진 위선과 허울을 풍자한다. 관객이 동조하는 건 명선의 절박함이다. 상영 시간 내내 명선의 애잔한 집착을 따라가다 보면 그게 설사 부활이 아닐지라도 무언가 다른 형태로라도 보답받길 바라는 기대가 싹튼다. 왜냐면 명선의 절박함은 진심이고 우리는 그 증거들을 영화 내내 충분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신세계로부터>는 종교와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없이 약한 인간의 부질 없는 소망과 간절함에 대한 영화다. 요약하면,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은 우리를 어떻게 바꾸어 놓는다.



사이비 종교에 속은 여성의 이야기라는 겉모습을 한 꺼풀 벗기고 나면 그 속에 새로운 질문이 우리를 마주한다. <신세계로부터>가 제시한 종교와 믿음의 단면을 목격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영화의 매커니즘이 연상, 비교된다.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 반면 영화는 눈에 보이지만 진짜가 아니라는 걸 모두 안다. 극 초중반 명선은 처음 자신의 믿음이 흔들릴 때 공룡박물관을 찾는다. 공룡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보고 온 명선은 신택에게 신을 본 적이 있냐고 추궁한다. 명선은 “공룡의 흔적만 보고도 사람들은 공룡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뒤집어서 던지면 더욱 오묘하다. 그렇다면 보이는 것은 믿을 수 있는가.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인가.

 
<신세계로부터>는 믿음의 두 얼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종교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동시에 (영화처럼) 보이는 것은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은 흑과 백, 진실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하여 영화의 마지막, 새로운 화주가 되어 눈이 멀어져 가는 명선의 모습은 끝이자 시작이다. 명선은 화주가 되었을까. 아들은 되살아난 것일까. 이 모든 것은 그저 명선의 환영일 뿐일까.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때때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큰 존재감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아들의 부활을 믿고자 하는 명선처럼. 명선의 간절함을 내내 목격한 우리처럼. 우리가 질문할 것은 ‘무엇을 보았느냐’가 아니다. 내가 본 것을 혹은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는 순간부터 새롭게 자문자답의 시간이 시작된다.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