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영상자료관
리플렛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02-27
옥지민
2022 경남영화아카데미 수료(사운드)
영화로 여행다니고 만나며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사람.
택시를 탈 때 기사에게 말을 거는 편이다. 무뚝뚝한 사람도 있지만 대개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낸다. 오랜 시간 운전하니까 외롭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걸까, 멋대로 짐작해본다. 운전하는 사람들은 대개 듣는 처지지, 말하는 처지가 아니다.
진해로 내려온 석우(곽민규)는 반년 넘게 버스를 운전하고 있다. 터미널 직원으로 일하는 영애(한선화)는 석우에게 유실물인 MP3를 넘겨받고, 그 MP3의 주인을 궁금해하는 석우에게 관심을 가진다. 누가 그냥 버린 MP3였을 텐데 석우는 왜 그렇게 그것과 주인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걸까. 영애는 석우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MP3의 물성과 그 안에 있는 음성 파일들은, 느낌과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일방적이다. MP3가 마치 토이 스토리처럼 살아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물건이 주는 느낌을 일방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좋고 싫음을 따지는 가치평가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 석우가 예전 애인에게 선물했던 역사가 있는 물건이라면 그 일방은 상처로 작용한다.
석우는 늘 승객의 말소리나 소음만 듣는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도 거의 하지 않는다.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보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을 텐데. 머릿속의 생각을 주체하지 못해 구부정하고 굼뜬 그의 모습은 마치 물리 엔진이 오류 난 캐릭터 같았다. 순환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입력에 어떻게 출력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는 듯했다.
생각은 맴돈다. 로터리에 갇힌 버스 뒤에 꼬리를 물고 늘어질 게 뻔하다. 가뜩이나 좁은 중원 로터리 안에 들쑥날쑥한 생각들이 멈췄다 가길 반복할 것이다. 앞으로 뒤로 치이며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 이럴 때 왜 로터리 밖으로 나가지 않느냐는 승객의 귀띔은 결과적으로 반갑다.
영애와 함께 진해의 골목을 다니며 석우는 서서히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을 가진다. 딱히 이렇다 할 이유나 큰 무게 없이 석우와 같이 따라다니는 영애가 낯설긴 했다. 수동적인 석우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껴서일까, 짐작해보지만 잘 모르겠다. 확인을 해보지 않았으면서 혼자 생각하고 단정을 짓냐는 영애의 질타는 석우의 기억의 로터리를 터 준다. 진해 골목을 다니며 만난 술집 겸 전파상의 주인도 그렇다. 돈으로 판매하는 술이 아니라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역전된 방향이 흥미롭다.
결과적으로는 반갑지만, 과정은 재미있지 않다. 방에 어머니가 먼지를 터는 것조차 달갑지 않다. 언젠가 열어 봐야 할 옛 시간이겠지만 지금은 보고 싶지 않다. 가지고 있고는 싶지만, 막상 꺼내 보려니 귀찮고 복잡한 계륵이다. 내 생각에 누군가 끼어들면 들킨 것 같고 부끄럽다. 석우의 옆에서 보챈 영애는 물론, 네가 만든 영화를 보자며 석우를 촉진한 부모님까지 타인이 있었기 때문에 석우는 로터리에서 나갈 수 있었다.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겨울이 거의 다 지나갔다는 걸 깨달을 때쯤, 혹은 겨울이 애당초 다 지나간 여름쯤에는 서글퍼진다. 겨울바람을 코로 들이마실 때의 찡한 느낌, 겨울 시골에서 짚 태우는 냄새가 그리워서. 때가 지나서야 놓쳤다는 걸 후회하고 그 감각을 그리워한다. 소소한 재미를 느끼지 못할 만큼 여유가 없었던가. 어떤 접근이든 반사하는 창문이 그때 나에게 있었던가. 창문을 열고 나와 새삼 겨울을 느끼는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