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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06-12
<잔칫날>: 눈물참고 불붙이기
<잔칫날>이 슬픔을 유예하는 방식에 대하여
남선우(씨네21 기자)
<잔칫날>의 제목과 서두는 임권택 감독의 <축제>(1996)를 연상시킨다. 두 작품의 영제도 ‘Festival'로 같다. 한국에서 가족의 장례를 일종의 연회로 호명하는 방식은 낯설지 않다. 그 첫인상은 아이러니로 각인된 다음, 친족 간의 용서와 화해의 결말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고인이 고령의 노인일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어른의 영혼만이 화합의 정령으로 기꺼이 해석된다. 두 영화는 장례 절차 속에 가족을 필두로 한 인간군상의 다종성을 배치하는 전개로도 유사하다. <축제>가 시골 가정집이 초상집이 되면서 드러나는 관계의 이면을 들춘다면, <잔칫날>은 칸칸이 나뉜 현대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머릿고기와 재단장식의 경제학을 읊는다. 언젠가 두 작품이 당대 장례 풍습을 기록한 영상 예시로 쓰여도 이상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잔칫날>을 본 관객은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잔치가 주인공 가족의 장례와 다른 곳에서 펼쳐짐을 알게 된다. 그 잔치 또한 곧바로 잔치가 아닌 것이 되지만 영화는 무엇이 잔치인지 특정하기보다 교란한다. 이와 연결되는, 제목이 지시하는 장소보다 중요한 차이는 영화 속에 남겨진 자들에게 <축제>의 죽음과 <잔칫날>의 죽음이 다르게 기능한다는 점이다. <축제>의 일가친척은 사멸을 전제로 갈등을 봉합하며 사진을 남기지만, <잔칫날>의 남매에게 생의 유한성이라는 진리에 스며들 여유 따위는 없다. <잔칫날>의 경만(하준)과 경미(소주연)에게 아버지의 임종은 그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를 부각하는 사건으로 선행한다.

<잔칫날>이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가족과의 사별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감정 분출을 유예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는 사려 깊은 응시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택하는 순서는 차라리 위악적이다. 영화는 인물이 슬퍼야 하는 형편을 먼저 보여주고는 인물의 슬픔이 터지는 시점을 자꾸만 뒤로 미루면서 그 곤경을 들여다본다. 눈물을 흘리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애도는 사치가 아니다. 그럼에도 3일 동안 벌어지는 장례식에서 남매는 유족으로 지내는 시간과 무관한, 어쩌면 그러한 실존으로부터 그들을 격리하는 각자의 정체성을 동시에 감내해야 한다. 행사장 MC라는 경만의 직업, 상주가 될 수 없는 경미의 젠더가 그것이다.
경만의 노동은 얼굴에 새겨진다. 그는 하얀 분칠을 하고 피에로가 된다. 일이 끝나면 반드시 거친 세수가 뒤따른다. 동생 경미는 병상에 누운 아버지에게 끝까지 가장의 이름표를 붙여주고 싶지만, 이 집의 실질적 가장은 경만인지 오래되었다. 그 자리를 공고히 하는 것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빚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형, 즉 남매의 큰아버지에게 진 빚 말이다. 경만은 사촌 형으로부터 큰아버지의 독촉을 대신 전달받는데, 이 사정은 안 그래도 빈궁한 경만을 노동 현장으로 떠미는 데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잔칫날>의 플롯은 이처럼 상중에도 남을 웃겨야 하는 경만의 역설을 중심에 두고 흐른다. 이튿날 경만이 삼천포 궁지마을에 다녀오기까지, <잔칫날>의 카메라는 인생을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말한 채플린의 통찰을 가지고 논다. 경만이 마을 잔치에 투입되는 상황도 블랙코미디지만 주로 경만이 누군가와 통화하거나 대면한 채 (대체로 안 좋은) 어떤 소식을 통보받는 신에서 카메라가 오가는 방향 그러하다. 카메라는 청자로서의 경만을 과녁에 놓고 근경에서 원경으로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경만이 짓는 난처한 표정이 프레임에 차오르면 카메라는 어느새 발을 뺀다. 그리고 삭막한 풍경 안에 홀로 남은 경만을 비춘다. 가까이서 비극인 경만의 처지는 멀리서 봤을 때 더 심한 비극으로 박제된다. 수시로 멀어지는 카메라와 경만 사이의 거리는 경만의 외로움을 보여주는 한편 이 외로움을 경만이 자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혹마저 불러일으킨다. 경만은 오빠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할 뿐 동생 경미에게 자신이 다녀온 ‘집’이 남의 잔칫집(이자 초상집)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그로 인해 고통은 동굴에 고이고, 책임은 분산되지 않는다.

나뉘지 않는 임무는 경미에게도 곤욕스럽다. 경만이 일터에서 한바탕을 치르는 동안 경미는 상가에서 허둥댄다. 경미에게 부과되는 곤란은 경만의 플롯이 영화를 지배하는 중간중간 틈입한다. 벌이에 치중하느라 혈육을 잊은 경만을 그의 무의식이 꾸짖듯 말이다. 경미는 계속해서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맞닥뜨리는데, 이때 경미의 ‘여성성’은 장남이 아니기에 상주가 못 되는 입장으로 구체화된다. 지극히 한국적인 에피소드가 줄을 잇는다. 경만 없는 장례식장에 도착한 사람들은 모두 경만을 찾는다. 상주라 불리는 경만의 결정을 기다리고, 그의 의중을 추궁한다. 조문객에 치이는 경미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일은 음식을 나르고 화투를 사 오는 잡무뿐이다. 온갖 공식적 결정은 경미를 건너뛰어 경만의 몫으로 남겨진다. 경만에게 전화를 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경미는 내내 무력한 존재로 형상화된다. 몇 차례 언성을 높이지만 그뿐이다. “오빠 욕하지 마요. 알지도 못하면서.” 경미는 경만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알게 된 다음에야 경만의 위치를 모르는 고모들에게 소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 계급과 젠더가 유발하는 남매의 곤궁은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을 뿌옇게 흩트린다.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선명해진 남매의 자리와 달리 이들의 감정이 발산될 자리는 보다 불분명해진다는 진술이 더 어울린다. 남매의 퍼포먼스가 지속될수록 관객의 페이소스는 배가된다.

하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남매는 불안정했다. 아버지는 2년 이상 투병하며 경제력을 잃었고, 어머니는 오래전 가족을 떠났다. 경만은 무명 MC로 경력을 쌓아왔고, 경미는 돈이 없어 휴학 후 아르바이트를 해왔다. 그렇다면 <잔칫날>은 왜 아버지를 사망에 이르게 해 두 사람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걸까. 아버지의 죽음이 그의 채무를 까발려 가장인 경만을 일하게 하고, 여성인 경미를 예식으로부터 소외시켰다는 결과론적 독법은 조금은 단순하게 들린다. 두 개의 죽음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궁지에 몰리는 경만의 이야기가 장르적인 효과를 낳는다는 감상도 맞는 말이지만 충분치 않다. 사실 김록경 감독은 한 인터뷰(<씨네21> 1266호 ‘슬픔이 필요한 이들이 슬퍼할 수 있기를-<잔칫날> 김록경 감독’)에서 이 질문에 대답한 적이 있다. 한 남자가 돈을 벌기 위해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사회를 보는 장면을 먼저 떠올린 다음 남자에게 왜 돈이 필요한지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아 시나리오를 덮어두고 있었다는 김록경 감독은 자신에게 금전이 절실했던 순간을 돌아봤다고 한다. 그러자 8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떠올랐고, 남자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다는 배경을 추가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다만 김록경 감독의 대답에 포함되지 않은 진실이 있다. 이 영화의 기저에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바라보는 특수한 시선이 있다. 그 눈빛을 복기하며 두 가지 답안을 들고 싶다.
우선 <잔칫날>은 비슷한 성격의 불행이 차별적으로 풀이되는 양상을 직시하려 한다. 그 비교 대상은 곧 경만 남매 아버지의 죽음과 일식(정인기) 남매 어머니의 죽음이다. 죽음이 어떻게 대우받는지도 문제지만 죽음이 있기까지 고인이 어떤 마지막을 경험했는지도 흥미롭게 대비된다. 경만, 경미의 아버지는 낚시를 좋아했다. 그는 병실에서 낚시 방송이 틀어진 TV를 올려다보며 온전치 못한 발음으로 “우리도 낚시 한번 가자”고 말한다. 젊은 남매에게 이 요청을 들어줄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반면 나이 든 일식 남매는 어머니가 무언가를 요구하기 이전에 움직였다. 지난해에 이미 아버지를 떠나보낸 일식은 남편을 잃고 웃음도 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한 번이라도 미소 짓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게 어머니의 팔순 잔치를 대규모 마을 잔치로 확장할 수 있는 능력자 일식은 서울시 교육청에서 일하는, 개천에서 난 용과 같은 존재로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받는다. 잔치에 일용직 사회자로 고용된 사람이 바로 경만이다. 이 대조에서 일식 남매의 불행이 부모의 죽음으로만 남는다면 경만 남매의 불행은 죽음보다 가난으로 대표된다. 돈의 유무를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지의 여부로 직결시키는 <잔칫날>의 혹독함은 뒤이어 일식 어머니의 죽음을 경만이 유발했다는 삼천포 주민들의 곡해로 한층 짓궂어진다. 범인을 발명해서라도 사인을 밝히고픈 이들과의 대결에서 경만은 철저히 불리하다. 그의 억울함은 휴대폰 카메라에 담긴 영상으로 밝혀지지만 그러기까지의 오해는 <잔칫날>의 비극성을 강화한다. 이 비참함을 완화할 수 있는 적임자로는 경만과 유사한 아픔을 겪었음에도 타인 앞에서 잠시나마 애통함을 잠재울 수 있는 일식이 유일하다. 일식의 신사적인 제스처는 경만의 분통을 터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경만이 밀쳐두었던 감정으로의 복귀를 촉구한다. 그 감정은 경만이 일식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면 온전히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를 비애다.
연출자로서 김록경 감독은 이와 같이 죽음이 빚어내는 아이러니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배우로 활동하다 2016년부터 직접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그의 단편 <꽃>(2017)에서는 한 여자가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간다. 그의 첫 장편 <잔칫날>과 함께 제2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받은 단편 <사택망처>(2020)는 아픈 아내를 살리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남자의 이야기다. 삶이 끝나가는 지점들이 교차할 때 생의 무게는 제각기 측정된다. 측정의 주체는 언젠가 목숨이 다하는 인간들 자신이다.

그런데 이 행위가 언제나 부정적으로 결론지어질까. <잔칫날>은 아버지가 부재함으로써 생겨나는 공간에서 비로소 경만 남매에게 허락된 희망의 가능성을 본다. 김록경 감독은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오프닝 신이 또 다른 엔딩 신”이라고도 말했다. 그는 남매의 “생활고는 계속되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며 웃고,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 혹은 예측을 덧붙였다. 김록경 감독에게 오프닝 신이자 엔딩 신과 같다는 첫 장면을 다시 보자. 경만은 어둑한 집 계단을 걸어 내려오며 우체통을 들여다본다. 아마도 고지서를 찾는 듯하다. 경만보다 앞서서 건물을 빠져나와 햇살 아래 선 경미는 늦어지는 경만을 재촉한다. 둘은 반말 사용을 두고 잠시 티격태격하지만, 곧장 웃으며 밖으로 걸어간다. 이 장면에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병원에 있거나 이 땅에 없는 셈이다. 잔인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버지와의 이별이 경미와 경만에게 100%의 슬픔은 아닐 거라고. 99.99%의 슬픔과 0.01%의 홀가분함일 수도 있다고. 감정의 비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기억에 남길 것은 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에서야 실재하는 그들의 미소다.
다행히 이 미소가 있기까지 두 사람은 온전히 아버지만을 위해 눈물 흘리는 시간을 보낸다. 오직 두 사람이 시체를 염하고 입관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잔칫날>은 엔딩 크레딧이 오르기 10여분 전에서야 경만과 경미를 재회시킬 만큼 독한 구석이 있지만 10분 만이라도 두 사람을 목 놓아 울게 하는 아량을 베푼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90분 넘도록 슬픔의 갈피를 찾지 못하던 남매에게 10분가량의 기회를 주는 <잔칫날>의 각본은 짐짓 윤리적이다. 상황 판단에 있어 최대한으로 냉정해지되 인물에게는 최소한으로 냉담해지려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이는 현대 장례식의 법식을 묘사하는 이 영화의 태도와도 닮아있다. 경만의 친구들은 5만 원과 10만 원 사이에서 부조금을 고민하고, 고모들은 경미에게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가르친다. 타인들을 경유할 때는 어쩐지 부조리한 허례허식으로 비치는 행태가 유족과 단둘이 남았을 때 숭고해진다. 경만이 돌아오기 직전, 경미는 발인 전까지 향이 꺼지게 둬서는 안 된다는 언질을 듣고 이유를 묻는다. 연기가 “고인께서 이승에서 저승으로 잘 가시라고 이어주는 길”과 같다는 대답을 곱씹던 경미는 꺼진 향을 뒤집는다. 경미가 향에 다시 불을 붙이는 건 경만이 돌아온 다음이다. 경만이 나타나자 미신을 따르는 경미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일식과 대면하고 차분해진 경만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테다. 슬픔을 나눌 수 있는 타인의 존재는 미약한 주문마저 믿고 싶게 만든다. <잔칫날>은 경만과 경미에게 그 기회를 느지막이 그러나 분명하게 내어준다. 영화는 이렇게도 우리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