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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앵커>: 달리는 청춘의 신체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05-14


<앵커> : 달리는 청춘의 신체


성상민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문화평론가) 



<앵커>는 표면적으로는 청소년의 성장을 그리는 작품이다. 육상 선수로 활약하는 여성 청소년 주인공 ‘한주’를 중심으로 그녀를 둘러싼 가족 환경과 학교의 모습, 그리고 갑작스럽게 찾아든 사건이 점차 중첩되고 조합되면서 펼쳐 나오는 이야기가 <앵커>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성장의 행로는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방향성으로 흐르지 않는다. ‘달리는’ 행위가 극의 중심인 것은 맞지만, 극의 중심은 ‘스포츠로 인한 쾌감’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가정 환경이 썩 윤택하지 않은 집안에서 한주는 어떻게든 자신이 육상으로 성공하길 원한다. 성공에 대한 욕망이 영향을 미친 덕분이었을까. 한주의 달리기 실력은 결코 느리지 않지만, 계속 배턴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하며 항상 실력보다 훨씬 못 미치는 성적으로 고생한다.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은 분명 제대로 배턴을 주고 받으려 하는데, 앞주자가 제대로 배턴을 받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점점 ‘대학 진학’과 ‘실업팀 입단’이라는 삶의 중요한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강인한 신체와 달리 마음은 자신을 전혀 돕지 않고 육상부 코치의 질책은 더욱 늘어간다. 코치가 모두에게 혼을 내면 괜찮은데 앞주자에게는 뭐라고 말을 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화를 내는 상황도 스트레스를 낳는다.


좀처럼 기록 단축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한주에게는 연이어 힘든 사건들이 계속 일난다. 산에서 약초를 캐며 생계를 유지하던 한주의 할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하면서 거액의 수술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수술비를 마련하는 것도 무척이나 막막한 상황에서 한주는 평소 자신의 가족을 돌봐주던 목사를 찾아가지만 오히려 한주는 목사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존재임을 깨닫고 만다. 모든 것이 점차 막막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하반신 장애를 지니던 동생 ‘영준’마저도 사라졌다.



자신의 곁을 언제까지나 지켜줄 거라 생각했던 가족들도 크게 다치거나 행방이 묘연해졌고, 평소 든든한 버팀목이라 생각했던 목사마저도 매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생의 행방을 찾기 위해 경찰의 손길을 빌리지만 오히려 경찰은 제대로 수사에 임하는 대신 한주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한주는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동생 영준의 실종된 배후에는 목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한주는 자신만의 싸움을 시작한다. 누구에게도 쉽게 도움을 구할 수 없는 가운데 믿을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의 달리기 실력이다. 동생을 구하고 진실을 구하기 위한 싸움은 한 편의 ‘레이스’가 된다.


‘달리기’에 대한 영화만으로 <앵커>를 접했다면 초반부 시퀀스가 지나자마자 빠르게 닥쳐오는 사건들과 정보들, 그리고 어느 사이 ‘스릴러’나 ‘서스펜스’로 변한 영화의 표면적인 장르에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영화가 ‘변질’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초점은 ‘청소년 주인공의 홀로서기’와 자신을 압박하는 ‘사회에 맞서는 움직임’에 맞추며, 이를 받쳐주기 위한 극적인 장치로써 사건들을 활용한다고 보는 편이 좀 더 어울릴 것이다.


한주는 무엇을 위해 계속 학교에서, 육상 트랙에서, 그리고 가족을 파탄 직전까지 몰아 넣은 범인을 잡기 위해서 달리는가. 집안이 가난하고 조금은 보잘 것 없어도 학교 육상부에서 끝없이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압박을 받는 한주에게 ‘가족’은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이다. 사회에서, 미디어에서 강조하는 ‘정상가족’과 달리 한주의 가정에서 친부모님은 보이지 않는다. 약초를 팔며 생계를 영위하고, 장애가 있어 혼자서 걸어다니기 어려운 동생의 존재는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대체 무엇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할 수 있는가. 오히려 흠짐이 없어 완벽하게 보였던 ‘목사’와 힘들때면 언제든지 도와줄 것처럼 생각했던 ‘경찰’이 앞장서서 한주와 가족을 압박하고 위협한다. 그리고 이 두 존재는 서로 유착하고 협력하며 이미 발생한 피해를 은폐하고, 새로운 피해를 만들기 위해 암약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학교도, 종교도, 사회 구조도 모두 한주를 돕기 보다는 계속 구석으로 몰아넣는 상황에서 믿을 것은 한주 자신이다. 그리고 한주가 지닌 소중한 신체적 능력인 ‘달리기’이다. 그러나 그 달리기는 마냥 아름답지 않다. 이미 영화가 은연 중으로, 또는 전면으로 학원 육상의 어두운 부분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겉으로 보이는 하얀 목표선은 결코 한주가 계속 달리는 목표 지점이 될 수 없다. 한주는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동생을 구하기 위해, 사고를 당한 할아버지의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달린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지지대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체’만을 스스로 믿기에 달리는 것이다. 명확한 목표선도, 같이 협력할 동료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체조차도 믿지 못하면 한주는 정말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다. 정작 사회적으로 신뢰를 형성하고 믿음을 나눠야 할 교육과 종교, 공권력이 제역할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남을 쉽게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신체만을 믿게 된 상황에서 영화는 한주가 달리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그리기보다는 때로는 처절하고, 때로는 막막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장면들이 지속적으로 쌓이고 맥락을 형성하면서, 한편으로는 한주의 달리기가 ‘생존’을 위한 행위라는 생각마저도 들 정도이다. 동시에 작품 내에서 은연 중에 등장하는 색채의 이미지처럼, 2010년대 한국 사회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세월호 참사’의 맥락까지도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계속 쌓여 있기에 비교적 단순할 것 같은 영화의 맥락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주인공을 감싸는 심리와 신체, 다시 그 전면을 감싸는 동시에 점차 압박하여 들어가는 구조적인 존재, 그리고 이 모두를 감싸는 불신과 절망의 감각을 모두 구현해야지만 <앵커>의 구도는 안정적으로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안타까운 것은 간명하면서도 깊이 들어가야 할 영화가 어느 순간에서는 멈칫하는 순간이 종종 느껴진다는 것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장르적인 요소를 일부 차용하면서 쓰지만, 이는 그저 장르의 형성을 위한 도구적인 요소가 아니라 한주가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어떻게든 성장하고- 다시 성장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역설적인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장르적인 컨벤션을 활용한 이중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플롯을 구성하는 단계에서는 이 두 가지 면모를 모두 획득하기 위한 소박하면서도 원대한 꿈을 꿨지만, 정작 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대신 어느 쪽의 토끼도 잡지 못한 채 휘청거리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아쉬움에는 연기자의 문제도 한몫을 하고 만다. 복잡한 심리와 계속 밀려드는 사건들 속에서 탈출의 실마리를 잡으려고 하는 ‘한주’ 역할을 맡은 박수연의 역할은 분명 인상적이다. 박수연의 이전 출연작인 김보라의 <벌새>나 최현규의 <소은이의 무릎>에서 느껴졌던 모습처럼, 박수연은 입체적인 주인공의 면모를 표현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을 한 것이 드러난다. 문제는 나머지 연기자들이 이를 도저히 받춰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일상적인 연기와 장르적인 상황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감독의 연출이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배우들의 연기도 맥락을 잃은 듯한 안타까움이 자꾸만 쉬이 스크린의 전면으로 드러난다.


분명 <앵커>는 아쉬운 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작품의 모든 순간까지 아쉬웠던 것은 아니다. 소위 청소년의 ‘신체 활동’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틀에 박힌 감동극으로 흐르기 좋은 상황에서, 최정민은 ‘신체’의 움직임을 판박이의 드라마틱으로 소비하는 대신 한국 사회에서 ‘신체’가 독해되는 방식을 읽으며 새로운 맥락으로 해석하기 위해 도전했고 그 결과가 바로 <앵커>이다. 그나마 KBS 스페셜로 시작해 TV 방영으로 얻은 인기를 토대로 개봉한 극장용 다큐멘터리인 <땐뽀걸즈>가 신체의 활동과 신체를 움직이는 당사자의 심리, 그리고 당사자를 아우르는 공간의 특성까지 모두 함께 아우르며 새로운 맥락을 만드는 몇 안 되는 한국 작품인 상황에서 <앵커>는 누구도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움직임을 펼쳐내려는 자세에는 충분히 주목할 지점이 많다. 마치 쉽게 목표에, 진실에 다다르지 못하더라도 포기하는 대신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한주의 모습처럼, 최정민의 영화도 이와 같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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